얼마 전에 도쿄의 한 숙소에서 벌어진 일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부엌에서 낯선 여행자들과 한 잔 하다 보니 조금씩 판이 커져서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많은 분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 중에는 이른바 보따리 장사도 있었고, 유학생도 있었으며, 나와 같은 여행자도 적지 않았다. 여기서 만난 흥미진진한 스토리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하겠다.
그런데 그 중에 아주 흥미로운 여행자를 한 명 만났다. 그는 매달 한 번씩 꼭 해외 여행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뭐 유복한 상황은 아니고, 평소 용돈을 아껴서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2박3일 정도 여행을 간다. 물론 아내에게 허락을 받고. 한데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도 한단다. 주로 홍콩, 도쿄, 오사카, 북경 등 우리와 가까운 곳이 단골이다.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그냥 비행기 타는 게 좋아서란다. 특히, 국제선에 대한 로망이 대단해서, 한 달에 한 번 이런 여행을 하지 않으면 열병이 날 정도라나. 하긴 한때 해외 여행이라는 것이 신분의 상징이었고, 어지간한 명소를 다녀오지 않으면 촌놈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아마 나도 그런 콤플렉스 때문에 부지런히 왔다갔다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비행 매니아라, 좀 심하긴 하다.
개인적으로 비행 자체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극심한 터뷸런스를 만나 기내가 흔들릴 때면 가슴이 철렁이고, 식은땀이 난다. 그냥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항공사마다 전략이나 서비스가 달라서, 이 부분은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이번 6월에 미국을 다녀올 때 이용한 항공사는 ANA. 정식 명칭은 전일본공수로, “All Nippon Airways”의 약자다. 여기서 공수는 “항공수단”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국적기는 JAL이므로, ANA는 우리로 치면 아시아나와 같은 존재. 그런데 재정 상황이 넉넉지 못한 JAL과는 달리, ANA는 착실하게 성장을 거듭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아무래도 후발 주자인데다가, JAL보다 가격적으로 저렴해야 하니, 여러 면에서 고안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이 회사의 성장엔 배울 점이 많다 하겠다. 특히, 하네다 공항은 ANA의 본거지나 마찬가지로, 최근에 연 ANA 전용 스카이 라운지는, 일반 손님용으로만 무려 700여 석을 자랑한다. 그 규모나 서비스를 꼭 체험해볼 계획이다.
아무튼 이런 고도 성장의 노하우는 당연히 우리가 습득해야겠지만, 실제 타보니 배울 게 한 두 개가 아니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최대의 성과라 하겠으므로 간단히 글로 요약해본다.
우선 일본 하면, 역시 디테일에 강한 나라라 하겠다. 비좁고, 열악한 주거 환경까지 떠올리지 않더라도, 특유의 합리주의와 결합해서 약간의 틈만 있으며 이것을 유용하게 전환하는데 큰 장점이 있다.
일단 좌석을 보자. 나와 같은 뚱보에겐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좁다. 그 경우, 이코노믹이면서 좌석의 크기가 넉넉한 프리미엄 이코노믹이 존재한다. 비즈니스처럼 비싸지 않고, 이코노믹 가격에 좀 더 얹어주면 된다. 실제로 미국에서 귀국할 때 이 좌석을 이용했는데, 일체 불만이 없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한편 3-4-3 배치를 기준으로, 중앙에 4석, 좌우 창가에 3석 하는 식의 구조인데, 우리와 좀 다르다. 중앙 4석을 반으로 갈라, 2-2의 구조로 변환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2-2의 사이에 약간의 텀을 둔 것이다. 그 경우, 가운데 낀 사람도 한쪽에 여유 공간이 있어서 좀 살 것 같다. 이번에 미국에 갈 때 이 좌석이 걸렸는데, 복도쪽보다 나으면 나았지 모자랄 것이 전혀 없었다. 뜻밖의 행운이라고 할까?
앞좌석을 살펴보면 상단의 왼편에 고리가 하나 있다. 대체 이게 뭐하는 것일까 했더니 해드폰 걸이라고 한다. 즉, 기내 방송을 볼 때 사용하는 해드폰을 사용하지 않을 때 잠시 걸어두는 용도다. 거기에 두면, 좌석에서 일어나 나갈 때 일체 걸리적거리는 법이 없다. 탁 무릎을 칠 만한 아이디어 아닌가?
모니터 하부에 두 개의 입력단이 나 있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모두 PC 충전용으로, 하나는 USB이고 또 하나는 BNC다. USB야 워낙 일반화되었으니 그렇지만, 좀 시대가 지난 BNC까지 배려하는 것은, 여러모로 좋게 다가온다.
컵 홀더도 두 개 준비되어 있어서 편리하다. 탁자를 닫았을 경우, 그 하단부에 부착된 고리를 쓰면 되고, 만일 식사나 무슨 이유로 열었을 경우, 모니터 하단에 또 있다. 즉, 탁자를 열고 닫을 때 언제나 컵 홀더를 쓸 수 있게 한 것이다.
좌석을 뒤로 젖힐 경우, 교묘한 슬라이드 방식을 이용해서, 안쪽의 좌석만 앞으로 좀 빠지면서 경사가 지게 하고, 전체 구조는 그대로 두는 식의 방법을 쓰고 있다. 이 경우, 뒤에 앉은 손님에게 일체 폐를 끼치지 않는다.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미덕이 적절하게 발휘된 대목이라 하겠다.
이렇게 뒤로 젖히면 아무래도 발을 쭉 펴고 싶다. 비즈니스야 당연하지만, 이코노믹에선 언감생심. 그래도 ANA는 꽤 친절한 배려를 했다. 발 받침대의 높이를 꽤 올려서, 쭉 다리를 뻗으면 그런대로 걸칠 수 있는 것이다. 또 발바닥 닫는 부분을 오돌도돌하게 처리해서 일종의 지압 효과도 거두고 있다.
이제 주요 관심사인 기내식으로 가보자. 개인적으로 제일 잘 먹은 기내식은 싱가포르 에어라인. 이 회사는 식판 자체의 사이즈부터 다르다. 통상 받는 상의 1.5배쯤 될까? 중국식의 파티 문화가 개재한 듯, 내용물도 푸짐하고, 퀄리티도 상당하다. 여태 다양한 항공사를 이용해봤지만, 식사 하나만큼은 싱가포르 에어라인을 쫓아올 적수가 없다고 본다.
반면 ANA는 어떤가? 기본적으로 기내식을 요리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양식, 중식, 일식 등 여러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을 초빙해서 메뉴를 짜고, 끊임없는 리뉴얼을 시행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내노라 하는 고수들의 솜씨가 투입되기도 한다. 하긴 기내에 제공하는 와인을 위해 보르도의 와이너리를 따로 매입하는 수준이니 무슨 말을 더할까?
사실 먹는 거 좋아하고, 보는 거 좋아하는 성격이라, ANA를 이용하면서 기내식 받는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크지 않은 식판에 촘촘히 놓인 음식들을 보면 뭐 하나 지적할 게 없을 정도로 높은 퀄리티를 자랑한다. 여독을 잠깐 잊을 정도로 황홀한 식감에 빠져들 수 있다.
세심한 승무원들의 배려도 잊지 말자. 식사를 다 전달했어도 혹 받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다시 체크가 들어가고, 뭐 필요한 게 없는지 항상 살핀다. 또 식사 후, 디저트로 나오는 하겐다즈의 배급도 잊지 않는다. 자고로 어떤 코스 요리를 먹던 마지막 후식은 역시 아이스크림. 이런 기내식에서 만나는 하겐다즈는 여러모로 뜻깊다.
이윽고 기내 방송을 이리저리 체크한 순간, ANA가 자체 제작한 영상물 코너가 있다. 무심코 들어가 보니 일본의 요리나 공예품 등 여러 분야에서 주목받는 대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주로 요리사들을 봤는데, 긴자나 신주쿠에 있는 명소의 주방장들이 실제 어떤 개념을 갖고, 어떤 식으로 요리를 만드는지 소상하게 볼 수 있었다. 이렇듯 자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항공사가 전세계에 얼마나 될까? 언제 기회가 되면 이 대가들을 하나씩 소개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개인적으로 불만 사항이기도 했는데, 꼭 짚고 넘어가자. 가끔 비행 중에 터뷸런스를 만나곤 한다. 그 경우 비상등이 울려 서둘러 자리에 앉아 벨트를 채워야 한다. 하지만 별 것도 아닌 것 갖고 호들갑을 떠는 경우가 많다. 좀 습관화되었다고 할까?
ANA는 어떤가? 적어도 이번 미국 왕복 중 단 한 번도 비상등이 켜진 적이 없었다. 그냥 운이 좋아서? 글쎄 ... 그럼 안전 불감증? 아니다. 늘 태풍과 지진을 만나는 나라라,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일 소등을 해도 아주 천천히 또 반대로 점등을 해도 아주 천천히 ... 그런 대범함과 세심함이 어우러진 여행, 다음번에 ANA를 만날 순간이 기대된다.
단, ANA를 이용할 땐 짐 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탑승 시에 검사가 철저하고, 단 1Kg이라도 일체 눈감아주는 법이 없다. 우리네 정서로는 좀 야박하기도 하지만, 그게 일본인들의 정서이며 또 ANA가 저렴한 가격으로 높은 서비스 퀄리티를 제공하는 비결 중 하나로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 또 약간 짧은 듯한 좌석 벨트는 본인과 같은 뚱보에겐 영 답답했다. 이 점만큼은 꼭 개선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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